게임 속에서 사람의 향을 찾습니다.

게임으로 읽는 인간과 세계

전체 글 5

고스트러너 - 명령 밖에서 태어난 이름

1. 가장 완벽하게 달리는 순간처음 들어선 전투 구역에서는 몇 걸음 나아가지 못하고 죽습니다. 총알이 날아온 방향조차 보지 못한 채 쓰러지고, 다시 시작하면 조금 전의 적을 넘은 뒤 다음 적에게 죽습니다. 그렇게 실패를 거듭하다 보면 어느 순간 길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어느 벽을 타야 하는지, 누구를 먼저 베어야 하는지, 언제 점프하고 대시해야 하는지가 하나의 순서로 이어집니다. 마침내 한 번도 멈추지 않고 구역 전체를 돌파합니다. 벽타기와 점프, 회피와 공격이 한 동작처럼 맞물립니다. 처음에는 불가능해 보였던 공간이 이제는 나를 위해 준비된 무대처럼 느껴지죠. 《고스트러너》를 플레이하며 가장 강한 쾌감을 느낀 순간도 이때였습니다. 여러 번의 실패 끝에 정답을 외우고, 내가 만든 안무처럼 완벽하게 실행했..

엘든 링 - 용사, 꼬마 항아리 | 깨진 그릇에 남은 용기 3부

1. 아이가 사라진 자리항아리 마을의 이야기가 끝난 뒤 그곳을 다시 찾아가면, 꼬마 항아리는 보이지 않습니다. 마을을 찾을 때마다 말을 걸어오던 아이는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가 있던 자리에는 작은 탈리스만 하나만 남아 있습니다. 항아리들이 친구에게 주는 선물, ‘벗 항아리’입니다. 꼬마 항아리가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적과 싸웠는지, 누구를 지켰는지, 마침내 바라던 영웅이 되었는지도 게임은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모험을 마친 자리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험이 시작되는 순간에 멈춥니다. 그러니 아직 그를 영웅이라 부를 수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이룬 업적도, 승리한 전투도 없으니까요. 그런데도 우리는 이 아이를 기사와 전사의 뒤를 잇는 용사라 부르려 합니다. 디아로스와 알렉산더..

엘든 링 - 전사, 알렉산더 | 깨진 그릇에 남은 용기 2부

1. 철권은 구덩이에서 시작된다림그레이브의 언덕을 걷다 보면 어디선가 사람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주변을 둘러봐도 사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목소리를 따라 절벽 위로 올라가야 비로소 땅에 박힌 거대한 항아리 하나를 발견할 수 있죠. 항아리는 자신을 전사 항아리, ‘철권’ 알렉산더라고 소개합니다. 꽤 거창한 이름입니다. 그런데 빛바랜 자와 철권이 나누는 첫 번째 협력은 전투가 아닙니다. 알렉산더의 밑바닥을 무기로 힘껏 때려 구덩이에서 꺼내주는 일입니다. 몇 차례 얻어맞고 땅에서 튀어나온 알렉산더는 호탕하게 감사를 전합니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음 싸움을 찾아 길을 떠납니다. 우스꽝스러운 첫 만남이지만, 그의 여정 전체가 이미 이 장면 안에 들어 있습니다. 알렉산더는 자주 넘어지고 혼자서..

엘든 링 - 기사, 디아로스 | 깨진 그릇에 남은 용기 1부

1. 다시 굴러떨어지는 바위 그리스 신화의 시시포스는 죽음을 거듭 속인 끝에 저승에서 끝없는 형벌을 받습니다. 거대한 바위를 산 정상까지 밀어 올리는 형벌입니다. 두 손으로 바위를 밀고, 굽은 등을 펴며 한 걸음씩 산을 오릅니다. 정상은 조금씩 가까워지고, 이제 몇 걸음만 더 가면 끝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위는 끝내 그의 손을 떠납니다. 정상에 닿으려는 순간 거대한 돌은 다시 산 아래로 굴러갑니다. 시시포스는 자신이 올라왔던 길을 내려가 다시 바위 앞에 섭니다. 다시 밀기 위해서입니다.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이 끝없는 형벌 속에 인간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루고, 잃고, 다시 시작하는 삶. 오늘 밀어 올린 것이 내일 다시 굴러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저마다의 바위를..

세키로 - 목적을 잃은 칼

1. 언제 괴물이 되는가프리드리히 니체의 『선악의 저편』 146절의 뜻을 우리말로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당신이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심연 또한 당신을 들여다볼 것이다. 사람은 언제 자신이 휘두르던 칼에 삼켜질까요. 더 강한 칼을 손에 넣었을 때일까요. 아니면 그 강함의 방향과 한계를 붙들어 주던 무언가를 놓았을 때일까요. 여기, 누구보다 목적이 분명한 칼이었던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수많은 사람을 베었지만, 적어도 그 칼이 누구를 위해 움직이는지는 알고 있었습니다. 오직 주군을 위해 칼을 들던 그가 어느 순간 목적도 명분도 잃고, 죽이는 일에만 취한 괴물이 됩니다. 그는 강함만으로 괴물이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